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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의 공간 철학, 어떻게 현대 건축에 스며들었나

by 디디s 2025. 4. 5.

오늘은 ‘한옥’의 공간 철학이 어떻게 현대 건축에 스며들었는지에 대해 소개해드릴 예정입니다.

 

‘한옥’의 공간 철학, 어떻게 현대 건축에 스며들었나
‘한옥’의 공간 철학, 어떻게 현대 건축에 스며들었나

 

 

– 마당, 대청마루, 열린 구조의 재해석

 

자연과 함께 숨 쉬는 공간, ‘마당’의 철학

한옥의 중심에는 늘 ‘마당’이 있다. 단순히 비어 있는 외부 공간이 아니라, 집 안에서 자연과 관계를 맺는 가장 본질적인 매개체다. 조선시대 한옥에서 마당은 햇빛과 바람, 비와 눈, 계절의 모든 흐름을 담아내는 곳이자, 가족과 이웃이 교류하는 생활의 중심이었다.

현대 도시 건축에서는 이런 마당의 개념이 사라진 듯 보였지만, 최근 다시금 건축가들 사이에서 주목받고 있다. 작은 주택이라도 중정을 두거나, 옥상에 정원을 만드는 식의 ‘작은 마당’들이 생겨나는 이유다. 이는 단지 공간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한 목적이 아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 자연과 단절된 도시인의 삶을 회복시키기 위한 시도이며, 나와 가족, 이웃 사이의 ‘시선이 닿는 거리’를 복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서울 성북동의 한 모던 한옥은 마당을 중심으로 ‘ㅁ’자 형태로 공간을 배치했다. 외부에서 보면 전통 한옥 같지만, 내부는 유리창과 현대적 재료로 마감해 자연광이 은은하게 퍼지는 구조다. 마당은 단순한 정원이 아니라, 공간의 중심이자 기능의 연결점으로 작동한다. 이처럼 한옥의 마당은 현대 건축에서 ‘자연과 연결된 인간 중심의 삶’을 다시 상기시키고 있다.

 

대청마루와 여백의 미학, 숨통을 틔우는 공간 설계

한옥의 대청마루는 실내도 실외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공간이다. 바닥은 높게 떠 있고, 사방이 열려 있어 자연과의 경계가 느슨하다. 그곳에서는 바람이 지나가고, 빛이 흐르며, 사람은 앉거나 누워 쉬어간다. 이처럼 기능과 구조를 초월해 삶의 리듬을 조절하는 공간이 현대 건축에서는 오히려 신선한 실험의 대상이 된다.

대청마루가 가진 핵심 가치는 '여백'이다. 가구나 장식 없이도 공간이 스스로의 의미를 가지는 것. 최근의 미니멀리즘이나 일본의 ‘무(無)의 미학’이 각광받는 흐름과도 맞닿아 있다. 여백은 단순히 비워진 것이 아니라, 쓰임을 기다리는 공간이고,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공간의 성격을 바꾸는 힘이 있다.

현대 건축에서도 이런 여백의 개념은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된다. 거실과 베란다 사이의 전면 유리 슬라이딩 도어나, 방과 복도 사이에 설치된 다다미방 같은 중간 영역이 그 예다. 사람들은 거기서 커피를 마시거나 책을 읽고, 혹은 멍하니 밖을 바라보며 쉰다. 딱히 뭔가 하지 않아도 좋은 공간, 그것이 바로 대청마루의 철학이 현대에 살아 있는 방식이다.

 

벽이 아닌 흐름으로 연결되는 ‘열린 구조’

한옥은 벽으로 공간을 나누지 않는다. 창호지 문 하나만 열면 방과 마루, 마당이 하나로 연결된다. 이러한 '열린 구조'는 공간의 활용도를 극대화하고, 바람과 빛의 흐름을 유연하게 만든다. 특히 사계절이 뚜렷한 한국의 기후에서는 이런 유기적인 공간 배치가 삶의 질을 높이는 데 효과적이다.

현대 건축에서도 이 열린 구조는 ‘오픈 플랜(Open Plan)’이라는 이름으로 확장되고 있다. 벽을 최소화하고, 주방과 거실, 다이닝 공간을 하나로 통합한 구조는 널찍하고 유연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한옥과의 차이점은 분명하다. 한옥의 열린 구조는 단순히 시야 확보나 공간 확장의 문제가 아니라, 자연과 연결되고 삶의 흐름을 존중하는 철학적 기조 위에 세워져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건축가 승효상의 '수졸당(守拙堂)'은 전통 한옥의 평면 구조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대표적 사례다. 거실과 마당, 서재가 열린 구조로 배치되어 있고, 각 공간 사이에는 문턱이나 벽 대신 자연스러운 단차와 재료의 변화를 통해 경계가 설정된다. 이는 기능 중심의 공간 배치를 넘어서, 삶의 흐름을 따라 움직이는 건축을 구현한 사례다.

이처럼 열린 구조는 물리적 개방감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관계'의 회복이며, 사물과 자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유기적 연결을 지향하는 건축의 새로운 언어다.

 


한옥은 단지 전통 건축의 유산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유효한 철학적 자산이다. 마당은 자연과의 교감을, 대청마루는 여백과 쉼의 미학을, 열린 구조는 관계 중심의 공간 사용을 제안한다. 이러한 요소들이 현대 건축에 스며드는 과정은 단순한 양식의 차용이 아닌, 삶을 대하는 태도의 재발견이라 할 수 있다.

전통과 현대는 대립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경계를 허물고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사람'과 '자연'이 있다. 한옥은 그 둘을 가장 아름답게 연결한 건축이며, 앞으로도 우리의 삶 속에서 그 철학은 계속해서 살아갈 것이다.